올해 전 세계 반도체 장비 투자가 역대 최대 규모일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한국에 가장 많은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됐다. 업계에 따르면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장비 투자액이 전년 대비 10% 증가해 역대 최대 규모인 980억 달러(약 116조6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코로나19 이후, 증가한 반도체 수요
반도체 투자액은 직전년 대비 2020년에 17%, 지난해에 39% 각각 증가한 것으로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는 추정했다. 올해까지 더하면 2020년부터 3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게 되는 셈이다.
아짓 마노차(Ajit Manocha)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 CEO는 “반도체 장비 산업은 AI, 자율주행, 컴퓨팅 등 최신 기술 발전으로 전례 없는 성장을 이뤘다”며, “코로나19가 촉발한 원격근무·교육 수요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생산량 확대 요구도 커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부문별로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에 대한 투자가 전년 대비 13% 성장해 올해 전체 반도체 장비 투자의 46%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메모리 분야는 올해 전체 장비 투자의 37%를 차지할 것으로 분석됐으며, 그중에서도 D램 투자액은 전년보다 줄되 낸드플래시 투자는 반대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지역별로 보면 올해 한국에서 반도체 장비 투자가 가장 많이 집행되고, 대만과 중국이 그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과 대만, 중국 등 3개국이 전 세계 투자의 73%를 차지할 것이라고 협회는 전망했다. 한국과 대만에 대한 투자액은 전년 대비 각각 14% 증가하고, 대 중국 투자액은 전년보다 2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반도체 공룡들의 투자 과열 경쟁
지난 1월, TSMC는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이에 삼성전자도 대규모 증설과 초미세 공정기술로 TSMC를 뒤쫓고 있다.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최근 TSMC는 올해 약 440억 달러 규모의 설비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TSMC의 투자 규모인 300억 달러를 100억 달러 이상을 웃도는 역대 최대치다. TSMC는 올해 투자액 가운데 70~80%를 2·3·5·7나노미터 공정 개발에 투입할 예정이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작년 3분기 기준)은 대만 TSMC가 53.1%로 압도적인 1위이며 삼성전자가 17.1%로 2위다. 전체 점유율 면에서는 TSMC가 삼성전자를 월등히 앞서지만, 5나노 이하 공정에서는 두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5나노, 7나노 등의 수치는 반도체 칩의 회로 선폭 규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회로의 선폭을 가늘게 만들수록 더 많은 소자를 집적할 수 있어 성능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5나노 공정을 할 수 있는 곳은 TSMC와 삼성전자뿐이다.
TSMC와 삼성전자는 현재 3나노 수준에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TSMC는 최근 설명회에서 올해 하반기에 3나노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에 차세대 GAA 기반의 3나노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GAA는 기존 핀펫 기술보다 칩 면적은 줄이고 소비 전력은 감소시키면서 성능은 높인 신기술이다. 양측의 계획대로라면 삼성전자가 TSMC보다 한발 앞서 3나노 양산에 들어가는 셈이다.
3나노 반도체는 주로 인공지능(AI), 5G, 전장, IoT 등의 분야에 활용될 예정으로 AMD, 퀄컴, 애플, 구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주요 잠재 고객으로 꼽힌다. 이미 애플이 내년에 TSMC가 생산하는 3나노 반도체를 탑재한 첫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TSMC는 2나노 공정 도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대만 언론에 따르면 TSMC는 업계에서 가장 먼저 2나노 공정 반도체를 양산하기 위해 신규 공장 용지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에서 2025년에 2나노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TSMC가 첨단 공정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삼성전자를 의식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2030년까지 세계 정상을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총 171조 원을 투자해 첨단 파운드리 공정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구상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올해 40조 원 이상을 반도체에 투자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3분기에 반도체에 29조9000억 원을 투자했다. 당장 올해에만 경기 평택캠퍼스의 세 번째 반도체 생산라인 ‘P3’ 공장 완공과 네 번째 생산라인 ‘P4’ 착공, 미국 파운드리 2공장 착공 등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하반기 완공 예정인 P3라인은 클린룸 규모만 축구장 면적 25개 크기로, 총 투자 규모만 50조 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대당 2000억 원이 넘는 극자외선(EUV) 장비를 사용한 최첨단 공정의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들어설 20조 원 규모 파운드리 2공장은 상반기에 착공한다.
지연되고 있는 반도체 장비 수급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팹 가동에 필수적인 장비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와 미국 인텔,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시설 투자를 집행하면서 장비 수요가 급증한 데다 전 세계적인 부품 수급난이 겹치면서 반도체 장비 생산에 차질이 발생한 까닭이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작년 4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에서 공통으로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 문제를 거론했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장 한진만 부사장은 컨퍼런스콜에서 “부품 공급망 이슈로 설비 반입 시점이 기존에 예정됐던 것보다 길어지는 추세”라고 언급했다.
SK하이닉스 사업총괄 노종원 사장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장비 리드타임이 길어지고 있다”며, “계획된 장비 입고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차질이 생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이 길어진 것은 주문이 급격하게 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디지털 전환 가속화와 IT 제품 수요 급증으로 반도체 수요가 대폭 늘었고, 미중 간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 기업들이 전례 없는 대규모 시설 투자를 집행하면서 반도체 장비 수요가 덩달아 증가했다.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은 장비에 따라 짧으면 3~6개월, 특히 대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극자외선(EUV) 등 장비의 경우 1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미리 주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시설투자 계획에 기반한 수요 예측에 따라 사전에 반도체 장비를 발주하는데 장비 주문이 몰리고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서 리드타임이 길어진 것이다.
TSMC는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440억 달러(약 52조3000억 원)를 설비투자에 투입하겠다고 밝혔고, 삼성전자와 인텔 역시 적극적인 시설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장비 투자액이 전년 대비 10% 증가해 역대 최대 규모인 980억 달러(약 116조6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파운드리 분야 투자가 전체의 46%, 메모리 분야가 37%를 차지할 전망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장비 제조사들의 생산 능력은 한정돼 있는데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의 시설 투자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신규 팹에 필요한 반도체 장비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전 세계적인 부품 공급망 차질도 반도체 장비 리드타임 장기화에 영향을 줬다.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도 부품 수급난에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피터 버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컨퍼런스콜에서 “원재료 공급망 차질과 부품 부족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며 ”공급망 이슈가 예상보다 많이 장기화하면서 4분기 출하량에 일부 차질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반도체 기업들은 장기 계약을 체결한 장비 업체에 우선으로 장비를 반입하도록 최대한 협조를 구하는 한편 시설 투자 계획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불확실성을 고려해 구체적인 올해 반도체 투자 계획을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부품 공급망 이슈와 장비 리드타임 장기화 등의 상황을 고려해 투자 계획을 수립하고 탄력적으로 집행한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장비 리드타임 장기화 추세에 대응해 올해 투자분 일부를 지난해 하반기에 앞당겨 선제적으로 집행했고, 특히 장비 발주를 예년보다 빠르게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장비 리드타임 장기화가 단시간에 해소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투자계획을 탄력적으로 집행하며 차질을 최소화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