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제조 ‘99단계의 제언’ (16단계 ~ 20단계)
초고령화 시대, 정년의 연장과 임금피크제의 도입. 진급은 어려워지고, 청년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는 지금. 저자는 1인 기업, 그중에서도 제조업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돈을 벌수는 있을까?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혼자서 일한다는 게 익숙하지도 않고, 지금 하는 일은 너무 지겨운데? 게다가 혼자 회사를 하고 있다고 하면 남들이 무시하지는 않을까?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하듯 아흔아홉 개의 조언을 제시한다. <편집자 주>
16. 하던 거 해라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과연 최선일까?’
이는 1인 기업 6년 차에 접어드는 내게도 여전히 고민거리다.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이거 계속해도 될까?’라는 두려움이 멈추지 않는다.
6년 차인 나도 이러니 예비창업자의 경우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최고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고(長考) 끝 선택은 대동소이하다. 패자부활전이 허락되지 않는 우리의 창업 환경 속에서 소위 ‘안전빵’으로 남들 하는 아이템을 쫓아가다가 뒤따라 죽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주위를 보면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을 기반으로 창업하는 경우는 의외로 적다. 상식적으로는 자신이 익숙하고 잘 아는 그 일을 해야 실패의 위험도 적을 것 같은데, 퇴사하면 한결같이 ‘새로운 일’만을 찾는다. 대체 왜 우리는 하던 일을 안 하는 걸까?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함을 미리 이야기해두고 싶다.
첫째 이유는 ‘지긋지긋해서’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못하겠고 보기도 싫은 것이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자. 지긋지긋했던 이유가 정말 그 일 자체에 있었나? 세상에 죽어도 하기 싫은 일도, 죽어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지긋지긋한 이유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일 외적인 것, 즉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그 일을 하는 방식, 그 방식을 강요하는 조직과 문화에 있다. 1인 기업을 하게 되면 이런 지긋지긋한 외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일 자체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 지긋지긋했던 일이 재미있어지고 내가 그 일을 싫어했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둘째, 속된 말로 ‘쪽 팔려서’다. 조직에서 한자리할 때는 목에 힘주며 갑 행세도 했는데, 이제 1인 기업으로 을의 입장에 서려니 체면이 안 선다. 특히 예전 부하 직원들과 동료들을 찾아가 굽실거리며 싫은 소리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편하다.
이런 자세라면 새 일을 하더라도 망하게 되어 있다. 1인 기업을 하겠다는 것은 ‘작아지고 찌질해지고 창피해지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오히려 1인 기업을 한다고 지인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리면 마음도 편해진다. 괜히 큰 사업 하는 척 허세부리는 것보다는 빨리 쪽 팔려지는 것이 낫다.
셋째, ‘익숙하지 않아서’다. 같은 일이라도 조직의 지시를 받아서 하는 것과 1인 기업을 세워 독립적으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세 번째 이유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무능을 직면하는 것, 자신이 주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가 정말 힘들다. 직장에서는 능력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혼자 나와서 스스로 하려니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치킨집 창업해서 닭 튀기다가 망하면 ‘다들 망하니 나도 망했다’고 말하면 되는데, 내가 잘한다고 인정받던 그 일을 하다가 망하면 과거의 영광까지 다 말아먹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고독의 끝판왕인 1인 기업을 하다 보면 어차피 자신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업종의 어떤 일을 해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도 자신의 한계와 무능을 직면하는 데 주저하지 말자.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1인 기업의 생존 확률은 배로 높아진다.
넷째, ‘하던 업종의 미래가 불안해서’다.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도 그 업종이 불황인 데다 전망이 안 좋아서인데, 미쳤다고 그 일을 계속해야 하나?”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회사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 때와 1인 기업의 대표일 때 해당 업종을 바라보는 시각은 180도 다르다는 것이다. 큰 회사에서 한계 업종 내지 사양 산업으로 보이던 시장이 1인 기업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블루오션인 것이다. 이는 6장에서 ‘시장에 불황기라는 가뭄이 들었을 때가 작은 기업에게는 오히려 좋은 시기’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섯째, ‘이젠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아서’다. 예전에는 직접 실무도 했지만 이제는 손 뗀 지 오래인 데다 여태껏 관리직으로 있어왔는데 지금 새삼 1인 제조를 하려니 엄두가 안 나고 몸도 예전과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엄살이다. 다시 몸을 차근차근 가동시키다 보면 원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80% 이상은 틀림없이 회복된다. 오히려 육체적·정신적으로 젊어지고 건강해진다.
결론은 ‘하던 일을 해야 성공 가능성도 커진다’는 것이다. 당신이 모든 것을 바쳐 해왔던 그 일은 충분히 그것으로 1인 기업을 창업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만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일명 ‘1만 시간의 법칙’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하던 일을 하더라도 예전에 조직이 내게 강요하고 지시하던 그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빛바랜 훈장 같은 자존심은 완전히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도 명심하자.
17. 하나만 해라
1인 제조란 ‘혼자서 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혼자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1인 제조는 혼자 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템 또는 한 가지 제조 공정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1인 기업을 하다 보면 ‘하나 더 해볼까?’ 하는 유혹을 떨쳐낼 수 없다.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욕심이 생겨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불안감이 생겨서 아이템이나 제조 공정을 늘리게 된다.
하나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목표 시장을 작게 잡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자제력과 인내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만드는 아이템에 대해 어지간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다른 경우긴 하지만, 1인 창업자 중엔 더블 잡(double job)을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그중 하나는 걸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낮에는 1인 제조를 하고 밤에는 다른 아이템을 찾는가 하면, 낮 시간의 절반을 주식 투자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의 머릿속엔 ‘일=복권’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복권은 n개를 사면 당첨 확률도 n배 높아지니 많이 사고 볼 일이 맞겠지만, 일은 복권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의 일에 집중할 때의 성공 확률이 20%라면 두 가지 일로 에너지를 분산할 때의 성공 확률은 40%가 아닌 20% 미만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일과 복권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복권 n개를 사려면 n배의 비용이 드는 것처럼, 일도 n가지로 다변화하면 n배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 성공 확률은 한 가지에 집중할 때보다 오히려 떨어지고 비용만 늘어나게 된다. 그 이유는 뭘까? 단순히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선택과 집중’의 논리 때문만이 아니라, 1인 기업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특유의 협업 구조 때문이다.
1인 기업은 혼자 할 수 없다. 즉, 내가 만든 제품과 보완되는 타사 제품을 묶어서 시장에 공급하거나, 아니면 내가 담당하는 공정 이외의 전후 연관 공정과 협업함으로써 제품을 완성한 뒤 납품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내 제품 외의 타사 제품까지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내 공정 이외의 전후 공정까지 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런 협업체제는 날아가 버리고, 오히려 나와 협업해야 할 업체들과 맞서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이런 상황이 되면 기존 사업까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1인 기업의 필수불가결한 성공 요소는 ‘주위에 나를 도와주는 지원 세력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지원 세력을 모두 적으로 만드는 것은 1인 기업이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준비 단계에서 내가 해야 할 그 ‘한 가지 일’의 범위를 명확히 설정하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상도의상으로는 물론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도 너무나 중요하다.
과욕을 부리면 1인 기업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혼자 할수록 함께해야 한다. 힘들어도 하나에 집중하자. 그러면 반드시 주위의 도움과 고객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18. 하나만 팔아라
한눈 안 팔고 제품 생산과 공정 개선에 최선을 다하면 고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소문도 나게 된다. 이럴 때 반드시 접근하는 자들이 있으니, ‘내 물건도 같이 팔아 달라’는 업체들이다. 이들은 내 고객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내 평판을 이용하고자 하는데, 그렇다고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나 역시 그 평판을 기반으로 타인이 만든 다른 제품을 함께 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갑을 만드는 1인 기업 대표다. ‘프리미엄 A급 소가죽 소재의 20센티미터짜리 남성용 장지갑’만을 전문으로 만드는 당신은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니 최고급 백화점에 입점하게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 “나는 10센티미터짜리 중지갑을 만드는데 함께 팔아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제품을 보니 품질도 괜찮아 보인다. 협력업체와 경쟁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도 아니고, 제품 검수 외에는 많은 시간을 뺏길 것 같지도 않으니 별다른 위험 없이 내 매출과 수익을 증대시킬 수 있을 듯싶다. 이쯤 되면 욕심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럴 경우 내 대답은 하나다. “힘들겠지만 당분간은 당신이 만든 것만 판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1인 기업은 혼자 하기 때문에 순도 높고 집중된 제품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는데, 다른 것을 함께 팔면 이것이 희석되고 만다. 아무리 내 것과 비슷해 보여도 결국은 다른 제품이기 때문에 고객은 “도대체 이 업체의 정체성은 뭐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브랜드에 투자하는 것이 곤란한 1인 기업에게는 순도 99.9%의 제품 이미지를 구축하는 일이 매우 절실하다. 그러나 타인이 만든 제품을 같이 판매하는 순간 이런 이미지 구축은 물 건너가버린다. 더구나 다른 제품의 품질이 내 제품에 비해 떨어지는 경우에는 내 제품에 대한 기존의 신뢰와 평가마저도 현격히 낮아지는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둘째, 다른 제품을 취급하다 보면 내 제품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제품에는 제조사의 철학이 담겨 있는데, 특히 1인 제조회사가 만든 제품은 아무리 작은 것에도 ‘나’라는 인격이 체화되어 있다. 수십 개의 업체가 동일 제품을 만든다 해도 내 제품은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 아무리 같은 재료, 같은 방식으로 만들고 같은 기능을 담았다 해도 내 것엔 ‘나만의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이 만든 제품을 같이 취급하다 보면 그러한 나만의 특성이 사라진다. 특히 타인의 것이 내 것보다 좋다면 내 것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은 점점 작아지고 어느 순간 타인을 따라 하게 되며, 그러다 보면 결국 내가 가졌던 모든 장점을 잃게 된다.
셋째, 제조가 아닌 유통에 익숙해지면 다시 제조로 돌아오기가 정말 힘들다. 위험을 감수하며 어렵게 제품을 개발하기보다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유통하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통은 그 수명이 제조에 비해 훨씬 짧다. 왜? 내 것만큼 오래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1인 기업의 목적은 ‘단기간에 얼마나 많이 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꾸준하게 버느냐’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을 파는 데만 전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유익하다.
내가 만든 것과 남이 만든 것을 같이 팔지 말자. 남이 만든 것이 안 좋으면 내가 만든 것까지 가치를 떨어뜨리고, 남이 만든 것이 좋으면 남의 것만 팔게 되고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1인 기업의 목적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체화된 독특한 제품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남이 만든 것을 ‘당분간’ 팔지 말라는 것이지 영원히 팔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 남이 만든 것을 팔 수 있을까? 이 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훗날의 이야기다.
19. 수출할 수 없다면 접어라
총 99개의 단계 중‘~ 아니면 접으라’고 말하는 유일한 단계가 바로 이 장이다. 수출할 수 없다면 접으라니, 여기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분들이 속출할 것 같다. 혼자 물건 만들기도 바빠 죽겠고 영어는 중학교 수준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15장에서는 ‘목표 시장은 작게 잡으라’고 했으면서 여기서는 왜 느닷없이 수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쯤에서 2장(‘왜 하필 제조인가?’)으로 돌아가보자. 2장에서 나는 1인 기업이 제조를 해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이야기한 바 있는데, 요약해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① 우리나라의 제조 환경은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다 (최소한 농업이나 서비스업보다는 경쟁력을 갖췄다).
② 고객은 보고 만질 수 있는 유형의 산물이 품질까지 좋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③ 제조된 산물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효용을 준다.
④ 제조업에는 A급의 전후방 협력업체가 많아 A급의 최종 제품을 생산하기가 용이하다.
⑤ 고객 입장에서는 나를 대체하는 경쟁업체와 제품을 찾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내 제품을 안심하고 쓸 수 있다.
⑥ 제조는 서비스나 1차 산업에 비해 시간적·공간적인 공급의 제약이 적다.
⑦ 세계적으로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인지도와 평가가 높은 편이다.
이상을 찬찬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이것들이 바로 수출을 해야 하는 이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제조의 경우 우리나라가 가장 잘하고, 해외에서도 이를 인정하며, 공급에 있어 시공간적 제약이 적으니 물류 및 보관 기간의 문제도 크지 않고,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제품을 통해 얻는 효용이 동일하므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을 그들도 그대로 쓰면 되는 것이다. 내가 1인 기업에서 제조를 키워드로 잡은 가장 큰 이유도 수출 때문이었다. 물론 수출 외에도 1인 기업에서 제조가 지니는 많은 이점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수출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
내 회사는 RFID 태그(한국에서는 무선주파수인식 태그 또는 전자태그라고도 한다)를 만드는 업체로 2004년에 설립되었다. RFID 태그는 주파수 대역과 인식 거리, 배터리 유무, 부착 환경에 따라 수백 가지로 세분된다. 그중 우리 회사는 900MHz 대역 태그만을 생산했는데 그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
2009년까지 우리 회사에서는 그 수십 종의 900MHz 태그를 모두 만들었다. 한두 가지만 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만들다 보니 제대로 된 태그는 하나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목표시장인 내수 시장이 공급 과잉 상태가 되어 제품 가격이 매년 절반씩 떨어지자 더 버틸 재간이 없어졌다.
빚만 떠안고 혼자 남게 된 나는 도대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수십 명이 일하던 회사의 사장으로 폼만 잡으며 살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해결해야 했으니 말이다. 어떤 제품은 계속 가져가고 어떤 제품은 버려야 할지, 어떤 고객은 잡고 어떤 고객은 떠나보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 정말 난감했다. 결국 제품이든 고객이든 뭐든, 나는 나 혼자 할 수 있는 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려야 했다.
당시 나는 세 가지에만 집중했다. 첫째, 품질로 제일 자신 있는 제품 하나만 남긴다. 둘째, 정상 마진 이상을 지불하고자 하는 고객만 남긴다. 셋째, 자신 있는 그 제품을 살 만한 전 세계 잠재 고객 100군데에 무상 샘플을 보낸다.
그렇게 100곳에 샘플을 보내는 데 수천만 원이 들었다 (이 비용은 미국 전시회에 부스 설치하고 참가하는데 드는 비용과 같았는데, 그때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고 무상 샘플을 보낸 것이 내가 한 결정 중 가장 잘한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 후 샘플을 받은 100군데 중 정확히 일곱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두 군데에서 첫 오더를 줬다. 하나는 영국 업체, 하나는 미국 업체였는데 지금까지도 그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VIP 고객들이다. 현재까지도 회사는 여전히 영세하지만, 그래도 30개국 이상에 수출 중이고 첫 수출한 그 제품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고 있다. IT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제품이라면 최소 10년은 간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놀라운 사실은, 수출에 주력하고 있음에도 얼마 전까지 나는 단 한 번의 해외 출장을 간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해외를 갈 돈과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조는 품질로만 말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정말 특화된 제품이라면 세계 시장이라고 해봤자 정말 한 줌에 불과하다. 앞서 100군데 잠재 고객에게 샘플을 뿌렸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100개 업체가 전 세계 시장의 거의 전부다. 내가 고객을 몰라서 못 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제품이 팔 만한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못 파는 것이다. 대신 좋은 제품은 지구 반대편,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고객도 알아본다. 15평짜리 내 회사의 수출국 중 하나는 이름도 생소한 몰타(Malta) 공화국인데 연간 100만 원 정도를 구매한다. 그래도 좋다.
역설적이지만 시장이 작으면 작을수록, 품목이 세분화되면 될수록 수출 시장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잘난 척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요즘 동대문 옷가게 중에는 인터넷으로 해외에 몇억 원어치의 옷을 파는 곳이 정말 많아졌다. 몇 년 전이라면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고 동대문 옷가게 주인들이 갑자기 다 해외 유학파로 바뀌었는가? 제품만 좋다면 외국인들도 다 산다. 영어는 그다음 문제다.
수출하는 데 있어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으니, 눈에 안 보이는 국가 간 장벽이 그것이다. 어떤 국가든 수입 제품에 대해 안전, 보건, 환경, 국가 안보 등의 이유로 각종 인증이나 승인, 시험 성적서 등을 요구한다. 솔직히 1인 기업이 이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 노력과 전문성을 감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직접 수출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나라를 대상으로 수출해본 경험이 많은 업체를 내세워 우산을 쓰는 편이 낫다. 이것도 분명 수출이다.
20. 생각보다 일이 많다
쥐의 뼈 개수는 223개라고 한다. 사람은 태어날 당시 270개의 뼈를 갖고 있는데, 그중 일부가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 붙어 결국 206개의 뼈를 가진다고 한다. 즉, 어릴수록 작을수록 뼈의 개수가 많은 것이다.
뼈 개수를 조직의 업무량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작은 조직보다 큰 조직의 업무량이 훨씬 많을 것 같지만, 사람보다 쥐 뼈의 수가 많은 것처럼 오히려 작은 조직의 업무가 더 많을 수 있다. 그렇다면 1인 기업의 설립 첫해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을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1인 기업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혼자 서너 명의 몫을 해내겠다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결심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 역시 1인 기업 첫해에는 월평균 330시간 정도를 일에 쏟아부은 것 같다). 더구나 그 일들 중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것은 일부에 불과할 뿐 대부분은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하니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어디 그뿐인가. 집에 오면 온몸이 천근만근인데 내일 할 일에 대한 걱정에 잠도 안 오니 정말 인생에서 가장 고난스러운 시기다. 이렇게 자신이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일이 많은 이유는 뭘까?
첫째, 예전엔 전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큰일이 되기 때문이다. 청소가 대표적이다. 회사 다니면서 쓸고 닦고 청소한 적이 있는가? 1인 기업에겐 청소가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혼자 살면 집 안과 냉장고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둘째, 예전엔 월급이나 축내는 부류의 일이라고 폄하했던 것들이 1인 기업에서는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전화 응대, 비품 구매, 프린터 토너 교체, 택배와 우편물 발송 및 수령, 하다못해 주차장에 있는 차를 빼주는 것 등 정말 많은 일을 직접 해야 한다. 전화 받는 것 하나만 해도 하루 1시간 이상을 그냥 잡아먹으니, 예전에 일 안 하고 전화만 받는다고 무시했던 이들에게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셋째, 업무 성격상 극과 극인 것들을 함께 처리해야 하는 경우 워밍업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터프한 현장 일을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와 자금 경리 업무를 하고 뒤이어 고객과 영업 미팅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각 해당 업무 모드로 내가 완전히 전환되려면 얼마간의 워밍업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중인격의 소유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넷째, 예전엔 알아서 편의를 봐주던 서비스 업체들이 1인 기업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당만 해도 그렇다. 예전엔 장부에 달아놓고 한 달에 한 번 결제하면 됐지만 이젠 매일 결제해야 하고, 택배도 예전과 달리 지금은 곧바로 결제해달란다. 이거, 은근히 시간 잡아먹는다.
1인 기업을 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하루 업무 시간에 3시간 정도를 더한 것이 실제 하루 업무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은 진짜 할 일 없으니 쉬는 셈 치고 하루 제쳐야지!”라는 생각으로 출근한 날에도 3시간 분량 정도의 일은 항상 있을 것이다. 이것이 1인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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